본문 바로가기
필사의 모든것

[돈의 역사] 중국의 농업 생산성은 개선되었을까?

by 책과함께라면 2021. 1. 10.

중국 농업은 긴 시간동안 생산성이 정체되어 있다가 1978년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1952~ 1977년 연평균 식량 생산 증가율이 4.1%에 불과했지만, 1978~1995년에는 무려 14.9%까지 상승했다. 이와 같은 생산성의 혁신은 무한정에 가까운 노동력 공급이 가능한 소농사회의 특성을 반영한다. [아시아의 힘]의 저자 조 스터드웰은 토지개혁이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경제성장을 위한 핵심적인)변화의 수단은 중국, 일본, 한국, 대만에서 집행된 일련의 토지개혁 프로그램이었다.(중략) 간단하게 말하자면 가용 농지를 평등한 토대 위에서 농업 인구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중량) 소규모로 분할된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이 생산량을 극대화 하는데 노동력과 잉여 자본을 투자하도록 장려한 결과, 4개국 모두 소출이 크게 늘어났다. (중략)

5인, 6인 혹은 7인으로 구성된 가족들은 1헥타르(1만 제곱미터로 약 3천평) 미만의 토지를 일구었다. 일반적인 경제 이론에 따르면 이런 구조는 비효율적이어야 한다. (중량) 신대륙의 대농장은 투자 자본 대비 가장 높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개발도상국에 적합한 농업적 효율이 아니다. 노동력이 넘치는 개발 초기 단계의 빈국에서는 추가 노동력에 따른 수익이 제로가 될 때까지 작물 생산을 극대화 하는 게 낮다.

예를 들어 집안에 어린아이와 몸이 불편한 노인이 있더라도 텃밭을 비롯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할 때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런 식의 농업은 중국인들에게 아주 친숙한 것이었다.

- [아시아의 힘]의 저자 조 스터드웰

 

자료: 中 华 人民共和 国国 家 统计 局, 中 国 海 关总 署, 中 国 粮油信息 网,  美 国 农业 部, KOTRA 청두 무역관

실제로 샤오강촌만 하더라도, 각 가구의 구분 경작을 결정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주변 산으로 가서 퇴비에 쓸 자원을 채취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막대한 노동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1978년 중국의 도시화율(전체 인구 중 도시에 사는 사람의 비율)은 단 17.9%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이 농촌에 살았던 이유는 도시로 이주했다가는 굶주릴 위험이 컸던 데다, 호구제도등으로 도시로의 이동에 어려움이 있어서였다.

 

이 결과, 중국 농총에는 여유 인력이 넘쳤고 이로 인해 생산성을 촉진할 동기(incentive)가 생겨 폭발적인 생산량 증가로 연결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농업 생산성 향상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1990년 중반을 전후해, 도시에 많은 일자리가 생기면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늘어났고, 나아가 노동력 투입에 따른 생산성 향상이 장애에 부딪히면서 식량 생산량 증가 속도는 둔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육류, 특히 돼지고기를 소비하면서 콩을 비롯한 사료용 곡물 수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식량 수입 의존도가 다시 높아지고 있다. 최근 미-중 무역 갈등 과정에서 중국이 미국산 콩에 대해 대규모 보복 관세를 부과한 일 이면에는 이와 같은 중국의 식생활 패턴 변화가 있었음을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돈의 역사] 기근이 시작되면 마녀 사냥이 시작된다

중세 온난기가 끝난 14세기부터 근대 초까지, 유럽에서는 약 1백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마녀로 몰려 사형당했는데, 이러한 일은 16~18세기에 집중되었다. 마녀 사냥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피해

hot-review.tistory.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