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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역사] 오다 노부나가 마키아벨리의 꿈 영원한 군주를 꿈꾸다.

by 책과함께라면 2021. 1. 5.

이탈리아의 정치 사상가 마키아벨리는 1494년 프랑스의 침입이후 도탄에 빠진 이탈리아의 상황을 구원할 이상적인 군주를 꿈꾸었다. 그는 <군주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기도 했다.

"군주는 전쟁 말고는 어떠한 목표도 생각도 직업도 없어야 한다." - <군주론>

오다 노부나가

 

 

 

그가 처한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는 주장이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받들어 장기간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과업을 밀고 나갈 군주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한때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칭송하며 그가 이상적인 군주가 될 것이라 믿었지만, 체사레 보르자가 31세의 나이로 요절함에 따라 마키아벨라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의 저자 김시덕 교수는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가장 잘 구현한 사람이 체사레 보르자라기보다는, 일본 전국시대의 무장 오바 노부나가였다고 주장한다.

 

노부나가는 일본 통일이라는 목표를 내걸고, 반 노부나가 동맹을 맺은 주변의 거의 모든 세력을 하나씩 제거해 나갔다. 특히 종교적 신념으로 똘똘 뭉친 세력을 위험시했는데, 당시 일본의 불교도들이 일종의 성전 개념을 도입하여 전투를 정당화하고 사후 세계에 대한 보장을 내세워 신도들의 전의를 복돋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포르투갈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 세력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가 육성하던 화승총 부대 자체가 유럽의 기술에 기반을 둔 것이었고, 가톨릭 세력으로서는 경쟁자인 불교 세력을 억제하는 데 노부나가의 군사력을 이용할 수 있었기에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셈이다.

오다 노부나가

1571년 노부나가는 불교 세력의 근거지인 교토(일본의 옛 수도로 당시 덴노(천왕)의 거주지) 북쪽의 히에아산을 포위하고 불을 질러 수천 명을 태워 죽이는 대량 학살을 자행하기에 이른다. 일본인들은 노부나가의 잔학 행위에 치를 떨었지만, 노부나가는 스스로 불법의 훼방자라는 뜻의 '제육천마왕 第六天魔王'이라 칭하며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노부나가는 종교적 권위까지 뛰어넘는 며확한 정치적 의지로 통일 전쟁을 수행하며, 일본의 정치 중심지인 교토를 장학했고, 서쪽 지방까지 정복해 나갔다. 그러던 중 1582년 자신의 부하였던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살해되고 만다.

아케치 미스히데가 노부나가를 배반하고 살해한 원인을 둘러싸고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마키아벨리의 꿈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오는 것이 인상적이다.

"군주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든 악행을 심사숙고해야 하며, 악행을 행해야 할 경우에는 한번에 몰아서 해야 한다. 악행을 되풀이하지 않아야 백성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기 떄문이다."

마키아벨리의 말처럼, 노부나가가 너무 많은 피를 흘리게 했기에 유교적 도덕관에 심취했던 아케치 미쓰히데가 주군을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히에이산 학살이 있은 지 11년이나 지나서 노부나가를 살해한 것을 보면 이 해석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노부나가가 원한을 많이쌓았다는 것은 부정할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참고로 교토 북쪽의 히에이산에는 과거에 벌어졌던 비극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히에이산 정상에 있는 엔라쿠지는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아름다운 사찰이니 관심이 있으면 가는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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