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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역사] 조선의 삼베는 어떻게 화폐가 되었을까?

by 책과함께라면 2021. 1. 1.

우리나라는 삼배가 오랫동안 화폐의 역활을 수행했다. 1123년(고려 인종 1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은 다음과 기록한 적있다.

 

"상설 점포가 없고 다만한낮에 정기시가 열려 남녀노소 관리들이 각기 소유한바로교역한다. 화폐제도가없어 오로지 모시와 은병으로 그 가치를 해아리고,일상용품 중 사소한 물품으로 모리 1필이나 은병 1냥에 못 미치는 것은 소량의 쌀로 값을 치른다. 그런다 백성들이 오랫동안 그 습속에 안주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조선의 삼베

 

 

서긍이 고려에 화폐제도가 없다고 한 것은 송나라처럼 주화를 사용할 줄 모른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실물화폐 경제였던 고려 사회에서 은병은주로고액 거래에 사용되었도, 그 다음은 모시, 소액 거래에는 쌀이 사용됐다. 물론 주된 거래 수단은 삼베였다. 그런데 1403년(조선 태종 3년) 사헌부에서 삼베를 화폐로 사용하는 것을 중단하고, 닥나무 종이로 만든 지폐, 즉 저화를화폐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삼국으로 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모두 삼베를 화폐로삼아 5승포를 썼다. 처음에는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고, 물건을 살 수 있어,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간사한 행위가 날로 늘어 삼배가 5승에서 3승으로 변하니시세가 떨어졌다."

 

실물화폐의 대표적인 폐단이 나온 셈이다.

 

 

 

1승은 80사닥을 의미하니, 5승은 실 400가닥으로 폭 8치를 짠 삼베를 말한다.(여기서 한 치는 한 자의 10분의 1 또는 약 3.03cm에 해당한다.) 1460년에 완성되고 공표된 <경국대전>에 1필은 저화 20장 그리고저화 1장은 쌀 1되라는공정 가격이 기재된다.

즉, 5승포 1필은 쌀 20되로 교환되어야 했다. 그러나 사헌부 관리의 지적처럼, 품질이 조악한 3승포가 시중에 유통되면서 조선 정부가 정한 교환 비율은 이내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조선은 마지막 순간까지 지폐를 통용시키는 데는 실패했지만, 조선 후기에 상평통보등 각종 다양한 주화를 방행하고 통용하는 데는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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